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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유교에 관하여

by 은요월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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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맹의 생애와 주요사상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교'란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의 학문을 이르는 말로, 동아시아 특유의 종교 및 철학 체계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 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기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역사

공자는 자기의 교학(敎學)이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성덕(聖德)을 갖춘 옛 성왕(聖王, 선왕)들의 도(道)에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 또한 이 "선왕의 도"는 주공(周公)을 비롯하여 준 왕조의 창설자들에 의해 밝혀져서 《시(詩)》나 《서(書)》 등의 경전(經典, 경서)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유교는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 · 윤리학이다. 따라서 유학이라고도 한다.
한나라의 무제는 전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 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董仲舒)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公許)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1]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에 유교가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유교는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는 맹자(孟子) · 순자(筍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秦) · 한(漢)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 《시》와 《서》 외에 《역(易)》·《예(禮)》·《춘추(春秋)》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五經)이 성립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 성리학이 성립되었다. 성리학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학의 도통(道通: 유학의 도가 전해져 이어온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내성파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 증자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의 4서가 성립되었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훈고학과 경학이 성립 · 발달하였다. 한나라 시대에서 《시》와 《서》 외에 《역》·《예》·《춘추》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이 성립되었다.
명나라 시대에서는 양명학이 성립되었고, 청나라 시대에서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공자가 사망한 후 공자의 제자들은 증자(曾子) ·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의 2파로 나뉘었다. 그 후 내성파의 전통은 맹자에게로 이어졌고 숭례파의 전통은 순자에게로 이어졌다. 그리고 순자의 사상은 제자백가의 법가가 사상의 한 유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한비자 등에 의해 법가가 성립되었다..
본래 공자의 유교라는 것은 인류 보편적 질서, 인간 내면의 심미적인 부분을 중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또한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하기를 원했으므로 사회 보편적 질서, 계급 간의 상호 존중, 등을 이론화하였다.

성리학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포함된다. 유교 추종자들은 공자의 이상을 교리화하고 강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며, 성리학으로 발전시킨다. 또한 명나라 시대에는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성리학 이론을 이용하게 되었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존재하였고, 왕족 간의 근친혼도 존재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지만 당시에는 교리화되지 않았으므로 세부적 제반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나라 시대는 유교 이론은 자연스러웠고 성리학의 획일성, 계급성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한나라 중기를 거쳐 후대에 이르면 유교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순장, 근친혼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여성의 평생 순결을 강조하거나, 지나친 계급 체제의 합리화는 유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성리학을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이 고려 후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지나치게 계급화되고 교리화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여성에게 가혹한 법칙들이 생겨났다. 성리학의 이와 같은 문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성리학이 유교 이론에서 파생되었다는 근거 때문에 유교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성리학에 제기된 문제 때문에 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론 또한 문제가 있다.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였으나, 그 후 맹자, 순자 등을 거쳐 변형되었고, 명나라 때의 성리학은 공자가 창제한 유교와 같다고 하기에는 도그 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한나라 시대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으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억압적인 규칙이 없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공자가 창시한 유교, 맹자와 순자가 개량한 유교, 교리화된 성리학은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그 이론들도 철학적 요소가 다르며, 그것이 적용되는 양상도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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