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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자와 공자의 생애초반

by 은요월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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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글에서는 공자와 공자의 생애초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공자

- 공자(쿵쯔) 또는 공부자(쿵푸쯔,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대부분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하게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춘추시대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2. 공자의 생애초반

- 탄생과 가계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취푸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 추읍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징재 사이에 태어났다. 숙량흘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아홉 명의 딸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첩과 낳은 아들 공피(孔皮)는 다리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에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안징재를 맞아 낳은 아들이 '공자'이다.

이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6세의 소녀였다.

 

공자 자가 중니(仲尼)인 이유는 집안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하는 공자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공자 조상은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 3대 전에 노나라로 왔다. 그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았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친 안징재는 낮은 신분의 무녀(巫女)였다고 한다.

소년 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곡부의 궐리(闕里)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고,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16세에 모친마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는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고,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 하였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대략 열다섯 살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는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다음글에서는 공자의 생에 후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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